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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외교사_요약12_안정과 혼란의 공존 (1921-1932)

    목차

    1. 로카르노 조약
    2. 평화운동(1) – 군축
    3. 평화운동(2) –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
    4. 소련과 유럽 열강
    5. 워싱턴 회의 이후

    본문내용

    – 서유럽 세계에서 안보와 배상 문제로 인한 갈등은 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조정의 단계에 접어듬
    –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완전한 종결 의미
    – 독일은 국제연맹 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 다시 국제사회에 복귀
    – 그러나 서유럽 지역 이외에서는 이미 대전쟁 알리는 불길한 현상 나타나고 있었음
    (로카르노 정신은 독일의 서부국경 지역에만 적용)
    – 소련 -> 근대국가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근대국가 타파를 명분으로 삼음. 이중외교
    -> 서유럽 세계와 명분의 충돌
    – 평화 파괴는 동북아에서 먼저 일어남 : 일본의 만주 침략.
    – 일본 군부 안에서 ‘관동군’이라는 새로운 집단 등장, 일본의 중국 침략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는 혼란의 시대가 비롯됨.

    1. 로카르노 조약

    슈트레제만 제안 (1925 1-2)의 배경

    – 1923 루르 점령으로 악화된 유럽 정치 분위기는 1924년에 접어들면서 해빙의 징조 보임
    – 로카르노 조약은 이런 분위기의 소산, 이 조약의 체결로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보아 이를 ‘로카르노 정신’이라 부름
    -> 로카르노 조약에 관한 교섭은 슈트레제만 독일 외상의 제안으로부터 비롯
    : 베르사유 체제를 당분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
    – 열강의 라인반트 철병 취소 : 연합국 측에서 독일 군이 군축규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있지 않다고 판단 -> 라인란트 철병하지 않기로 결정
    -> 슈트레제만은 영국과 프랑스가 동맹 체결할지도 모른다는 정보 입수 + 연합군의 철수와 베르사유 조약의 이행이라는 두 가지를 타협하는 방안으로 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제의하기에 이름.
    – 영국이 슈트레제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중요한 의미 가짐 (베르사유 조약이 개정되기 이전에, 라인란트 지방이 연합국에 의해 점령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이 프랑스의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을 한 것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13_이탈리아와 일본의 팽창 (1922-1937)

    목차

    I. <이탈리아>
    1.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등장
    2. 독일의 재군비
    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원정
    4. 스페인 내란 (1936.7-1939.3)
    5. 1936년 후반의 독일외교

    II. <일본>
    1. 만주사변
    2. 1937년의 세계

    본문내용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 이탈리아도 서유럽의 로카르노 정신과는 상반되는 정책노선 추구
    – 1922.10 파시스트들의 로마입성으로 최초로 극우정권 수립한 무솔리니 : 국제정치 질서의 수정을 요구하며 다뉴브 강과 발칸 반도로 세력 확장 도모
    – 당시 이탈리아의 구조적 모순 (외국-국내 자본 충돌, 도시-농촌 대립)
    → 1차 세계대전 후 더욱 심화되어 전후에는 거의 정치적 무질서 상태
    → 파시스트들이 로마에 입성하기까지 네 차례 내각이 바뀌었는데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활동을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에 경제계의 우려가 심화되었음
    → 결국 경제단체들과 정부기관들은 파시스트 지원

    무솔리니

    – 1921.11 파시스트 국민당 결성
    – 1922.10.28 파시스트들이 로마에 입성 →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출발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발칸진출

    – 무솔리니 : 다뉴브 강 유역과 발칸 반도로 진출하려고 함
    → 이 지역에 이해관계 갖고 있던 프랑스, 소련과 마찰
    – 알바니아 진출부터 시작 : “코르푸 사건”
    → 알바니아-그리스 국경 획정 문제 담당하던 장군이 그리스 영토에서 피살되자 무솔리니가 코르푸 포격, 점령 → 이탈리아는 그리스로부터 상당한 양보 받고 영국의 압력으로 철수
    (무솔리니의 모험주의 노선을 잘 나타내 줌)
    → 알바니아의 조구 : 친 이탈리아 노선, 유고슬라비아와 적대관계
    (유고슬라비아 : 프랑스와 우호관계)
    → 1926.11 무솔리니와 조구(이탈리아-알바니아) 우호동맹 체결
    → 프랑스-유고슬라비아 1927.11 유사한 합의 체결하고 이탈리아에 대항
    → 이탈리아는 다시 알바니아와 20년간의 방어동맹 조약 체결 → 알바니아 완전히 이탈리아 영향권으로 들어감
    – 무솔리니 : 베르사유 조약 수정 요구하는 헝가리와 제휴(1925 무역협정, 1927 우호조약)
    → 현상 타파국가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함

    제 8장 제 2절 혼란의 세계외교사

    – 1929 대공황 → 일본으로서는 중국 침략의 절호의 기회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11_베르사유 조약 체제 (1919-1929)

    목차

    1. 베르사유 회의의 구성과 원칙
    2.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1) –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
    3.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2) – 그 밖의 평화조약들
    4.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3)
    5. 러시아와 오토만 제국의 붕괴
    6. 배상문제
    7. 안보 문제
    8. 워싱턴 회의와 동북아

    본문내용

    – 1919.6.28 정신적인 투쟁의 산물이며 독일의 민족적 자존심을 파멸시킨 문서.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을 잉태하고 있었음.
    – 역사적 특징 : 1. 서유럽 세계를 중심으로 한 평화 조약 (동유럽은 전쟁 상태)
    2. 소련이란 정치 집단을 철저히 배제하고 이룩된 평화 조약 (배제의 단계를 벗어나 볼셰비즘 정권을 아예 타파하려는 분위기에서 이룩된 평화 조약)
    3. 서유럽 중심 평화 질서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침략과 비행에는 애써 눈을 감음 (동북아 세계에 대한 일본 침략 인정)
    4.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의 질서 만듦 (이탈리아 문제)
    5. 국제사회의 조직화 필요성 절감, 국제연맹 창설
    6.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절충한 산물이기에 매우 불완전한 형태. 국제법 질서는 부정적 현실을 타파하려는 적극적 측면 가짐

    1. 베르사유 회의의 구성과 원칙

    구성

    처음에는 10인 이사회가 최고 이사회 대표. 1919. 3월 하순 부터는 이탈리아 제외한 4인 이사회가 중요한 역할 담당

    회의의 민주주의 형식

    – 연합국들 자신이 비밀외교의 타파와 공개외교의 채택을 표방했기 때문
    – 민주주의에 대한 평등 원칙이 국내정치이건 국제정치이건 정치 명분이 되었기 때문
    – 5국 강국 이외의 국가들은 자국의 입장과 주장을 밝히는 자료들을 이사회에 제출하며 그 대표들이 직접 이사회에 참석해 발언할 수 있게 함. -> 민주주의 방식이 신속한 회의 진행 저해하는 역효과도 초래

    회의의 원칙과 독일 문제

    – 회의의 원칙은 휴전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독일 정부가 수락한 윌슨의 14개 항목.
    – 이 원칙들은 윌슨의 이상주의 반영, 국제사회의 전면적인 개편을 구상
    -> BUT 그의 이상과 유럽 정치 현실 사이에는 현격한 괴리
    -> 먼저 프랑스 안보문제와 정면에서 충돌 (프랑스 군이 독일의 부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주력해 영구적으로 라인 좌안 점령, 병합하려 함. 윌슨과 영국 수상의 반대)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10_제1차 세계대전 (1913-1919)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제1절 전쟁의 세계화

    당시 유럽의 정세
    → 1890년대
    – 프-러 동맹 VS 3국 동맹. 영국은 다시 고립 정책으로
    – 이탈리아-프랑스 : 교환각서. 3국 동맹의 중대한 수정 의미. 이중외교
    – 독일-영국, 독일-러시아 대립
    – 영국-일본 동맹 (1905 2차 동맹. 1911 갱신)
    – 영국-프랑스 협상 (1904) : 러-일 대립이 전쟁으로 발전할 경우, 프-러 동맹과 영-일 동맹이 현실적으로 발효될 것을 우려해 전쟁 예방 위해 영-프 협상 이루어짐
    → 영국은 더 이상 프랑스를 위협적 존재로 간주하지 X
    프랑스는 영국을 자기편으로, 이탈리아 중립도 보장
    →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VS 3국 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구도
    : 군비경쟁, 군사협력 증진 (미국 하우스 대령의 보고)
    → 독일은 오스트리아 외에 의지할 곳이 없어짐
    → 제1차 세계대전발발의 원인
    – 발칸전쟁 : 1912-1913. 러시아의 후원에 의해 발칸 동맹 성립
    발칸국들의 동상이몽 → 몬테네그로 대 터키 선전포고 (제1차 발칸전쟁)
    런던회의 개최 (1912.5) → 불가리아의 선제공격으로 제2차 발칸전쟁 (1913.6-8)
    → 부카레스트 조약 (1913.8) : 터키는 불가리아와 전쟁해 아드리아노플 되찾음
    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의해 분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관계 악화.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8_세계분할의 완료 (1875-1899, 191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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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 1890년대부터 유럽시대는 끝났고 비유럽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유럽의 정치가 안정될 수 없는 역사적 단계에 접어들음. 어느 지역 문제이건 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세계는 강대국들의 국제정치 ‘틀’에 들어가게 됨
    – 근대국가 : 식민지 국가, 경제 국가, 군사 국가
    – 식민지 국가로서의 근대 국가 완성 : 유럽 열강의 세계 팽창의 완료
    – 경제 국가로서의 근대 국가 발전과정 : 자본의 무국경성 → 밖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 안으로는 계급의 갈등 초래. 계급의 무국경성 → 모체인 근대국가에 대항 (공산주의 운동 대두)
    – 군사국가로서 근대국가의 발전 : 군부세력의 등장과 그 강화. 군사기술의 발달로 일시적인 군사동맹이 아니라 군사안보 일반을 염두에 둔 일반적인 군사동맹의 필요성이 대두됨
    –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유럽 열강의 동북아 진출은 1894 중일전쟁과 1904 러일전쟁으로 완료
    – 1882년 영국의 이집트 병합으로 유럽의 아프리카 분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02년 보어 전쟁의 종식으로 이 지역의 잠식도 끝남 → 유럽 열강은 다시 지중해와 발칸으로 돌아감

    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이집트 문제

    – 유럽 이외의 국가들이 근대화, 서구화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 → 외국 차관에 의존
    – 이집트 : 1875-1876 이스라엘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영국과 프랑스 부채의 상환이 불가능해짐 → 이집트의 재정상태 악화, 국제정치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
    → 1876.11 영국, 프랑스 이집트 경제를 공동으로 지배키로 합의 (~1882)
    – 1882 ‘강베타 각서’ : 이집트의 현존체제가 더 위험을 받게 되면 간섭하겠다고 경고
    → 독일은 영국-프랑스가 긴밀하게 되자 국제회의 소집 요구 (1882.6 콘스탄티노플 대사회의)
    – 이집트의 국내 사태 혼미, 외국에 대한 저항 강베타 각서 문제로 더욱 격렬
    → 튜픽(이집트 태수) :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사미내각 구성
    → 양국은 이 내각의 해체를 요구하는 최후통첩 보냄
    – 1882.7 영국은 군사행동 결심 (수에즈 운하의 자유 운행 보장 위해)
    → 영국 :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공동보조 요청하였으나 이들은 군사개입이 초래하게 될 국제적인 여파를 우려해 군사동원 기피. 영국의 단독 군사행동 (~1954 까지 군사점령)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9_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894-191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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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 중일전쟁(1894-1895) : 두 나라가 서유럽으로부터 수입한 군사국가의 형식에 의해 최초로 치른 전면전쟁. 완전한 의미의 근대 전쟁이라기 보다는 서유럽 세계에 의해 조종된 전쟁이었음
    – 중국 : 영국의 돈줄에 의해 전쟁 수행 가능했음 (전후 배상금도 영국 차관으로 지불)
    – 일본 : 영국의 후원 아래 승리할 수 있었음
    – 영국 : 러시아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중국보다는 일본을 지목
    –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수입된 군사국가의 형식이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것을 자각하고 군비증강에 몰두해 러일전쟁의 길로 나아간다.
    – 중일전쟁으로 중국 대륙은 사오분열 됨.

    1. 전쟁 원인론

    전쟁원인에 관한 견해들 – 정치적인 측면

    – 중일전쟁은 1894년에 있었던 양 국간 최초의 근대적인 전면전쟁
    – 일본의 계획적인 도발로 발발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일본이 전쟁을 왜 도발했느냐에 의견 다양
    – 정치.군사적인 측면 강조 : 1890년대의 국제정세 또는 당시 일본의 국내 정치상황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음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도시, 농촌을 막론하고 빈민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었고 이 해결의 길을 중일전쟁이라는 해외진출에서 찾았다는 것,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후퇴를 만회하는 길은 중국과의 전쟁밖에 없게 됐다는 것)
    –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의 일관된 대외팽창의 역사적인 경향으로 설명하려는 견해 : 중국과의 전쟁은 일본 역사상 필연적으로 일어날 전쟁이었으며 단지 1894년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발발한 것은 개전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그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
    – 메이지 유신 이래 해외침략의 길을 걸어온 일본이 1890년에 이르러 침략의 첫번째 대상이 조선이라고 지목하고 이것을 이익선이란 명분으로 호도함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7_새로운 동맹들의 형성 (1891-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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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 1890년에 들어서면서 ‘현대적’인 특징들 나타나기 시작, 동맹들이 새로 형성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
    – 이렇게 형성된 세력들이 투쟁적인 집단 심리와 결부되어 서로 적대, 동맹들은 더욱 경직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구도에서 영국과 독일의 대립구조로 바뀜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예고
    – 비스마르크 후임자들 : 러시아와 연결 단절, 러시아는 프랑스나 영국으로 가는 길로.. 식민지 문제로 프랑스는 영국과 다시 연결
    – 비스마르크 계승자들이 ‘세계정책’ 추진하자 동북아 지역에서도 ‘독일’ 이라는 요소 등장
    → 중국 : 본격적으로 분할의 단계에 들어감
    → 일본 : ‘수입된 국가’ 형태인 근대국가의 탈을 수용하는데 성공, 1890년 보편 선거로 제국의회 성립, 한반도를 ‘이익선’으로 선언, 중국과 대립할 것 공언
    → 조선 : 1880년 이후 ‘변형된 사대질서’ 속에서 고민하였으나 1890년 이후로 중국과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모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6_유교권 질서의 붕괴 (1784-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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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기존 동북아 세계질서 : 사대, 조공, 유교적 속박
    → 아편, 성경, 대포를 통해
    유럽적 국제질서 편입 : 주권, 식민, 조약
    유럽의 근대적 국제정치 질서 : 주권적이며 독립적인 근대국가를 그 구성단위로 하고 근대국가를 넘어선 상위의 정치적 존재를 인정하지 X
    유교권 질서 : 서열적. 19세기 초부터 전 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한 유럽 열강들에 의해 점차 붕괴되어 갔음
    → 그 결정적인 붕괴의 시작 : 아편전쟁

    아편무역
    – 중국→영국 : 차, 견 영국→중국 : 목화, 면직물
    → 1784 귀정법 : 차 수입세 1/10으로 인하 → 동인도 회사의 은 확보 곤란하게 됨
    → 1814 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 독점권이 폐지된 이후 영국의 면직물이 인도에 들어오게 되자 그 결제수단인 은의 부족이 더욱 심각하게 되었고 그 돌파를 중국에 대한 아편판매에서 찾게 되었음 → 중국에 아편을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영국으로부터 면직물을 수입하는 것
    → 1823년부터 아편이 면화보다 더 수입되기 시작
    → 1826년부터 중국은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져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유출
    → 린쩌쉬 (흠차대신) : 1939. 외국 상인에게 아편을 인도할 것과 장차 영구히 아편을 갖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을 요구
    → 1839.7.7 린웨이시 살해 사건 (영국 선원이 중국인 린웨이시 살해)
    → 1839.12.6 린쩌쉬는 영국과의 무역 중단. 아편을 수출입 금지품으로 선언, 아편의 파괴를 명령,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무역 중지 요청
    → 1840.2-3 영국 : 중국에 원정군 파견
    → 1842.8.29 난징조약
    : 중국을 구미 열강의 반 식민지상태로 전락하게 만든 최초의 법적 근거.
    (5개 항구 개방, 영사주재, 공행상인의 무역독점권 폐지, 배상금 지불)
    → 1843 “후먼채 조약” : 난징조약 보완 →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조항
    → 난징조약은 실상 전쟁의 원인이었던 아편 문제에는 아무런 규정이나 해결 못 봄
    중국은 1858년 톈진 조약 체결까지 아편무역 승인 거부

    1844.7.3 왕샤 조약
    → 미국-중국 (1843 영국-중국의 후먼채 조약에 규정된 최혜국대우 조항으로 구미 열강의 조약 체결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음) : 중.미양국간수호통상항해조약 34조
    : 영사재판제도 더 완비, 교섭 채널 명백히 규정, 아편 금지(but 최혜국대우 조항으로 언제든 할 수 있음), 외국선박의 중국 연안무역이 용이하게 됨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4_이탈리아 & 독일 통일 (1830.1848-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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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벨기에 독립

    – 1830년 파리 7월 혁명 발발
    → 벨기에 독립운동으로 발전
    → 벨기에의 독립은 빈 회의 체제의 수정 의미. 5대 강국의 공동관심사
    → 유럽의 정치판도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3국의 동유럽(개입) / 영국, 프랑스 2국의 서유럽(불간섭)으로 구분
    – 러시아가 벨기에 간섭에 폴란드 군대 동원하려는 것이 도화선이 돼 폴란드 군대에서 반란
    → 러시아는 폴란드 점령.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자국에 편입된 폴란드 지역 동요 방지에 주력 → 1831 벨기에에 관한 5개국 의정서로 벨기에 독립.
    – 의의
    → 벨기에 독립은 빈 체제에 대한 수정이었음 BUT 분쟁이나 전쟁 거치지 않고 열강들의 합 의로 이룩했다는 점에서 유럽협조체제의 한 성과
    왜냐하면 폴란드 문제로 동유럽 3국이 간섭할 여유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폴란드와 이탈 리아 문제(7월 혁명의 영향으로 1831.2 모데나와 파르마의 반란을 시작으로 일어난 이탈리아 각지의 혁명으로 야기된 문제)에 신중히 대처하고 자제함으로써 동유럽 3국과 마찰 회피

    출처 : 해피캠퍼스

  • 세계외교사_요약5_비스마르크 동맹체제, 러시아-터키 전쟁(1871-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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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비스마르크의 기본 외교 노선
    : 1. 유럽정치질서의 현상유지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 현상유지 / 프랑스, 이탈리아, 발칸제국들 : 현상타파)
    2. 프랑스의 고립
    : 현상유지정책의 한계 :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국내에 등장, 현상유지를 열강에 요구하려면 그들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했음. 러시아-오스트리아 사이의 적개심, 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마찰 해결 X (현상타파를 통해서만 조정될 수 있었음)

    오스트리아 보이스트 재상 : 러시아와 화해하는 것과 발칸지방에서 러시아 세력확장에 대처하는 길은 오로지 독일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길 뿐이라고 봄
    → 1871.8-9 독일, 오스트리아 황제 회동
    (독일 : 유럽정치질서의 현상유지 강조. 1864년에 결성되어 당시 전성기 맞고 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공동대처 필요성 역설
    오스트리아 : 독일 주장에 찬동. 오스트리아가 장차 유럽 동남 지역으로 진출할 경우 독일 지원 요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는 여러 현안 남아있었지만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모두 “현상유지”를 원함
    → 1872.9.6-12 베를린 회동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 발칸지방의 현상유지 의견 일치
    1873.5 독일-러시아 군사협정 : 일방이 유럽국가 공격 받으면 타방이 지원
    → 곧 사문화 (러시아는 이행할 의사 없었고 독일도 이 협정 승인 거부)
    1873.6.6 러시아-오스트리아 쇤브룬 협정
    →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방문해 중요한 문제는 서로 협의한다는 정치협정
    → 10월에 독일이 가입해 “1873 3제 협상” 성립
    → 프랑스 고립 목표로 하는 비스마르크의 구상 최초로 현실화
    → BUT 모호하고 이완된 내용 → 1875 조작된 위기 : 첫번째 시련

    1875년의 위기 (발칸반도 문제 시작. 1875.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반란~)
    : 독일이 프랑스의 급속한 회복에 불안 느끼고 프랑스와의 관계 약화되자 러시아와 유대 강화에 박차를 가함
    → 프랑스는 독일의 움직임을 프랑스 공격의 조짐이라고 보아 프랑스-독일 관계 극도로 악화
    → 1875.5 러시아가 베를린 방문해 분쟁 일으키지 말도록 경고. 영국 대사 러셀도 경고
    → 독일은 1873년의 3제 협상은 쓸모없는 약속이고 프랑스가 독일의 공격 받는 경우 영국과 러시아가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터득하게 됨

    출처 : 해피캠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