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위치에 관한 논란

목차

1. 머리말

2. 대구광문사와 국채보상운동
(1) 대구의 사회경제적 상황
(2) 대구광문사와 국채보상운동의 발기
(3) 대구광문사 위치 비정 논란

3. 북후정과 민회
(1) 민회를 통한 운동 확산
(2) 북후정 위치 비정 논란

4. 대구에서의 여성 활동
(1)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2) 기생 앵무

5. 맺음말

본문내용

1876년 일본은 포함(砲艦)을 조선으로 보내어 무력시위를 전개한다. 이로 인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되고, 조선은 이른바 만국공법체제에 편입되었다. 무력시위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이후 단계적으로 조선을 잠식해나갔으며, 우리민족은 일본의 침략 과정에 따라 여러 형태의 저항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저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자주적인 의식이 표현된 것이다. 침략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이른바 을사늑약 이후 구체화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라고 할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침략정책의 일환으로써 대한제국(大韓帝國) 정부에 거액의 차관 1천 3백만 원을 강요함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일본은 개항 이후부터 조선의 경제를 잠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을사늑약을 전후로 대한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종속시키고자 다양한 경제적 침략을 자행하고 있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 후 일제는 여러 명목으로 높은 이자의 차관을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 정부는 1905년 1월 화폐정리 자금 명목으로 일본제일은행으로부터 300만원을 차입하였다. 6월에는 구채(舊債) 상환 및 국가 재정 부족분 보충비 명목으로 국고증권(國庫證券) 200만원을 발행하였다. 이를 일본정부가 지불보증을 하여 일본 내에서 비용을 모집해 들였다. 12월에는 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한 금융공황 구제를 명목으로 일본제일은행으로부터 150만원의 금융자금채를 차입하였다.
또한 1906년 통감으로 온 한국에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안전과 부원개발(富源開發)을 위해 차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하며 시정개선 명목으로 그해 3월에 일본으로부터 1,000만원의 차관을 빌리도록 주선하였다.

출처 : 해피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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