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러시아사 – 보고서 (트로츠키와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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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기의 가장 뛰어난 연설가라 불리는 트로츠키는 1988년 고르바초프가 정치적인 사후복권을 지시하기 전까지, 소련에서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본명은 레이바 브론슈테인으로, 1879년 우크라이나의 부농(쿨락kulak)이었던 유태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오데사와 니콜라예프에서 실업학교를 다녔는데, 이때부터 또래 젊은이들과 정치 토론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곳에서 첫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소콜로프스카야도 만났다. 마르크스 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899년에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게 되지만, 1902년 런던으로 탈출해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Iskra」지에서 일하게 된다. 플레하노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새로운 연인인 나탈리야 세도바와도 만났다.
그러던 와중 1903년 7월 브뤼셀에서 열린 제2차 당 대회에서의 당원 자격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나뉘게 되었는데, 트로츠키는 마르토프를 지지하면서 레닌과 사이가 멀어졌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레닌의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을 모두 비판하면서 양 측의 비호감을 사게 되고, 이후 플레하노프가 「이스크라」를 담당하면서 트로츠키는 1904년에 뮌헨으로 거처를 옮기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내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황실에서 10월 선언을 발표하자, 귀국한 트로츠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활동하지만 12월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가게 되고, 빈으로 탈출해서 저술활동에 주력하는데, 이때 출판된 『평가와 전망』에는 영구혁명에 대한 주장이 담겼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17년 러시아 황실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참여한다.

출처 : 해피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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