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소론의 분당과 명재 윤증의 활동

목차

1. 머리말

2. 노론 소론의 분화 과정
1) 회니시비(懷尼是非)
2) 윤증의 활동

3. 맺음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명재 윤증(1629~1714)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노론과 소론의 분화, 그 분기점에 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윤증은 17세기 기호 지역 서인을 대표하는 학맥과 가문을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자가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명재라는 호는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지어준 것이다. 서인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윤증의 조부 윤황(1571~1639)은 성혼의 사위였으므로 그 가문 자체가 서인 학통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윤황은 인조 대 조정에서 후금(=청나라)에 대한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김상헌과 함께 반청 척화론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받았다. 윤증이 자신의 삶과 가장 큰 관련을 가진 인물인 송시열(1607~1689)과 만난 것은 28세 때인 1657년(효종 8)이었다. 그는 김집의 권유로 회덕으로 가서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은 일찍이 과거와 벼슬을 포기했지만, 이미 20대 후반 무렵 상당한 명망을 얻었다. 그는 1658년(효종 9)에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되었다. 그는 85세의 노령으로 별세할 때까지 수많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에 사대관계를 요구하기 위하여 사신을 조선에 보냈을 때, 윤선거(1610~1669)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청의 사신을 죽이라고 주장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병자호란으로 강화도로 피신한 뒤 자신의 친우들은 물론이고 큰아버지인 윤전과 자신의 아내가 자결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본인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척화주전론을 주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신과 가문은 물론이고 국가적 차원의 재앙을 막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재혼을 포기한 채, 김집(金集, 1574~1656)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만 몰두한 채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출처 : 해피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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